글로 이어진 인연이 있다면, 이별은 없는 걸까 “내 사랑 백석” /김자야
이별은 없다.
최근 이 말을 서로 다른 곳에서 두 번 만났다. 하나는 시쓰기 포럼에서 이혜미 시인님이 마지막 수업 때 해 주신 말이다.
인생에 한 번이라도 함께 시를 써 본 사이에는 이별이 없어요.
시인님은 함께 글을 쓰고 나눈 친구, “문우”라는 말을 하셨다. 글쓰기 관련 포럼을 몇 개 참여해 보았지만, 시라는 장르는 좀더 내밀한 무언가가 있었다. 시를 읽을 때면 모호한 어떤 그림자가 때로 답답하게 느껴지곤 했는데, 그래서 ‘글자와 글자 사이, 문자 사이에 숨는 것’이 시라고 생각했왔다. 그런데 오히려 시를 쓰고 읽으며 다른 누군가의 삶의 한 장면에 쑤욱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잊고 있었던 내 인생의 한 장면을 끄집어 내고 나누면서 무엇보다도 내가 투명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다른 하나는 <내 사랑 백석>이란 책에서 만났다. 시인 백석과 기생 진향(책의 저자인 자야)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날, 약간의 술기운에 백석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훗날 백석은 그에게 “자야”란 이름을 붙여준다. 그들은 몇 년 간의 연애 후 헤어진다. 그러다 남과 북이 나뉘고 남은 생에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한다. 그와의 사랑을 기억하며 “김자야”란 이름으로 1995년 판순이 넘은 나이에 <내 사랑 백석>이란 책을 낸다. 1996년 백석은 북한에서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자야도 1999년 사망했다.
이별은 없다고 했지만 결국 함께 한 시간보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더 긴 세월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 엄밀히 말하면 80년 넘는 생애에서 그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은 고작해야 몇년 뿐.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인간의 생애도 무한한 시간을 상상하면 참으로 짧게 여겨진다. 이별이란 말도 유리잔에 부딪쳐 흩어지는 빛처럼 다르게 느껴진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생의 한 순간 만나 사랑했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쌓고 그 기억을 간직한다면 결국 이별이란 말이 다 무슨 소용일까. 그게 곧 이별이 없는 게 아닐까.
백석의 저 말은 자야의 기억에 남은 말이다. 수십년이 지나도 살아남은 육성이다. 그리고 문장으로, 책으로 다시 태어났다. 실제로 두 사람이 다시 만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별도로 저 말을 기억하고 책으로 남겼다면 그렇게 새로운 인연을 쌓았다면 그야 말로 이별은 없는 것이라고 나는 진심으로 믿고있다.
시인의 말은 소소하고 뭉근한 말이라도 예지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법의 주문처럼.
많은 사람이 고백하듯, 나에게도 시에 눈을 돌리게 해 준 첫사랑이 있다면 그건 단연코 백석이다.
단지 종이에 박힌 활자일 뿐인데, 글자일 뿐인데, 읽자마다 한 사람의 내면 풍경이, 영혼의 그림자가 내안에서 펼쳐지는 마법같은 순간을 경험했다. 그때 느꼈던 서글픔과 경이로움을 잊지 못한다.
그렇게 시인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시인의 글과 영혼은 살아남는다. 독자인 우리들 안에서.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글>을 옮긴 소설가 배수아는 옮긴이의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작가는 불멸의 존재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작가 자신의 위한 것도, 작가의 것도 아니라고. 불멸에 관여하고 불멸을 생각하고 불멸을 느끼는 이는 바로 읽는자, 그러니까 우리라고.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글,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내용 중 옮겨서 다시 씀.
그렇다. 지금 살아있는 나는 시를 듣고 글을 읽으며 과거의 어떤 시간을 다시 내 안에 생생하게 담아둔다. 그건 내 안에서 새로운 빛깔과 새로운 향기로 되살아난 이야기다. 그 이야기가 아직 여기 있음을, 매번 새롭에 태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니까 곧 불멸을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읽는 독자로서의 나이다.
육체는 멀어졌으나 이별한 것이 아니로
사라졌으나 소멸한 것이 아니다.
그토록 긴 시간이 지났어도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을 생생하고 애틋하게 글로 되살려 냈다면, 그렇다, 이별은 없다.
백석을 앍고 난 후부터 그의 생애, 그가 사랑했던 이들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사랑했던 자야가 백석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남겼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 책을 사고 책장 어디엔가 꽂아두었다가 이제서야 그 이야기를 들었다. 글 안에서 되살아난 이야기들이 내 안의 무언가를 더 깊어지게 한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딱 하나 있다면 백석의 연인으로서가 아닌, 시인과 사랑을 했고, 험난한 한 시대를 살아낸 한 사람으로서의 목소리가 더 짙었으면 어떨까 싶었던 점이다. 나는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사람에게 더 끌린다.
나도 언젠가 그런 목소리를 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