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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쓴 이야기

다시 읽어야 보이는 것들 “상호대차; 내 인생을 관통한 책”

by 산책꾼 2022. 6. 20.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이 필요한 나는, 그런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때 한껏 예민해진다. 일상의 소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타인의 목소리에서 해방되어 내 앞으로 파고들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때 내안의 고약한 마음들이 스멀스멀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다. 한번 형체를 갖춘 고약한 마음은 누군가를 향해 그 날카로운 끝을 들이밀어야 사그라들기 시작하고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일 때가 많다. 더 고약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진다. 그 끝이 나를 겨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난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상처를 주게 된다는 반복되는 패턴.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누구보다 내 곁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일 때가 많다. 내가 곁을 주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그게 한 사람이라는 것도 한바탕의 폭풍이 지나간 뒤, 내 자신을 질책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오늘도 그랬다. 나를 가장 필요로 할 순간에 나는 그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 외면해야 내가 숨쉴 수 있었다. 비겁한 변명이지만. 나를 지키기 위해 결국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밀려오는 후회의 시간.

몇 년 전, 그러니까 이렇게 내가 나를 비롯한 주변을 괴롭히기 전, 제주도 여행에서 만난 책이 있다.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우도에 있는 책방, 밤수지맨드라미. 우도를 가며 그곳을 꼭 가보고자 했다. 그때 내 옆에도 내가 가장 사랑하고 동시에 서로를 가장 힘들게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청귤차를 마시며 각자가 고른 책을 약간 쪼그려 앉다시피 하고 읽었다. 책을 읽다가 생각이 나면 앞에 앉은 사람을 한번, 창밖의 풍경을 한번 바라보고 다시 책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때의 평화로웠던 우리는 어디에 간 것일까.

그때 손에 들고 있었던 책이 “상호대차; 내 인생을 관통한 책”이다. 조용한 책방에서 살금살금 발을 옮기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도서관 상호대차는 내가 자주 이용하는 서비스이기도 했다. 그 여행 내내 이 책을 읽었다. 처음 다 읽고 나자 이 책을 쓴 사람과 친구가 된 것 같았다. 이 글을 쓴 사람에겐 내게 없는 시간을 되돌아보는 여유가 느껴졌다. 지나간 시간 속의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힘껏 보듬어주는 용기와 여유가 있었다. 그 이후로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책의 책등만 보아도 언제나 손을 뻗으면 이야기를 들려줄 친구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이 든든했다. 그러다 몇 년 만에 다시 읽었다.

이 책엔 작가가 만난 책에서 길어올려진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책들은 한 때 작가의 시간에 흔적을 남겼다가 다시 읽는 시점에 새로운 흔적을 남기고, 글을 쓰는 시점에 다시 한 번 되살아나 해석된 이야기들이다. 이 시간의 겹들이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보게 하기도 하고, 잊고 있었던 나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을 다시 조망하게 하기도 한다. 시간의 틈을 두고 다시 읽는 행위는 그렇게 더 깊어지게 만든다. 어깨에 힘을 빼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준다.

책을 다시 읽고 몇 년 전의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거기 있다고 생각해서 잘 보지 않는 사진들. 그 안에서 내가 아닌 우리를 눈여겨 보았다. 혼자였다면 나오지 않았을 표정들, 프레임 밖을 향하는 시선들. 사랑한다는 행위는 몇 번이고 다시 보고 다시 사랑함으로써 깊어지는 것임을, 진짜 용기는 손을 내미는 것임을 잊지 않도록 내게 다시 말해 준다.

이 책의 들어가는 말에서 작가가 말했듯, 이 책이 나의 마음을 돌아보게 했으니, 이제 진짜 움직일 때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 사이를 돌고 도는 책과 이야기를 통해 내 기억이 끌어올려 지고 그 동력으로 내 삶이 나아가듯 이 책 또한 당신을 움직였으면 좋겠다.

강민선, <상호대차>, 들어가는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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