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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7

별의 시간 별의 시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쓴 마지막 작품이다. 작가 본인의 삶 가운데 일부를 떼어 내 형상화한 두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둘은 기존의 작품들에 등장한 (리스펙토르를 닮은) 인물들에 비해 작가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지성의 이해를 불허하는 인물인 마카베아는 언어로 재현할 수 없는 신비 속에 있다. 마카베아의 비극적인 삶은 이상하리만치 강렬하고 선명해서 마치 서사가 아닌 사진처럼, 단숨에 치고 들어왔다 사라지는 강렬한 빛-순간처럼 다가온다. 스물세 살에 쓴 데뷔작 『야생의 심장 가까이』에서 언어와 사고를 통해 가장 멀리까지 다다르겠다고 선언했던 리스펙토르가 마지막으로 당도한 지점이 여기다. 언어적 사고를 무효로 만드는 순정한 비극 혹은 세계. 이 공허하고 투명한 .. 2023. 3. 7.
삶과 예술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비비안 마이어 전기> 비비안 마이어 부제: 보모 사진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현상하다 원제 VIVIAN MAIER DEVELOPED: The Untold Story of the Photographer Nanny By Ann Marks 비비안 마이어를 처음 만나다 “비비안 마이어”라는 매력적이고 미스터리 한 인물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그랬듯 그 인물의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와 현상도 하지 않은 채 남긴 수많은 작품에 매료되었다. 그 사진들을 보며 나 자신을 보았다. 나 역시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다. 비비안 마이어에겐 내게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범함과 끈기, 집작에 가까운 몰두와 재능이라 불리는 어떤 것. 반가웠다. 내가 보고 싶었지만 다가가지 못했던 세상에 용기 있게 걸어 들어가 순간을 담아 시간을.. 2022. 10. 10.
빗속에서 열린 새로운 세계, <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이란 배수아 작가의 장편소설을 읽고 남긴 메모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나는 방금 매우 낯설고 아름다운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그건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닌 세상이다. 한없이 고독하지만 어디론가 연결되어 있는 그림이다. 나를 전혀 다른 곳에 데려다 놓는 음악이다. 낯설지만 빠져들고 싶은 세계. 친절하게 웃으며 손 내밀 지는 않지만 자기 자신을, 혹은 어떤 세계를 조용히 응시하며 서서히 밝히는 문장들. 드러내고 싶어서가 아니라, 가만히 바라보듯 그려냄으로써 다가가고 싶어 쓰인 이야기를 오랜만에 만났다. 22.06.27 일기장 메모 중에서 처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자주 길을 잃었다. M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 글은 어떤 암시도 없이 갑자기 특정 장면으로 나를 데려가 숨 막힐 듯한 임사체험을 제공.. 2022. 7. 3.
다시 읽어야 보이는 것들 “상호대차; 내 인생을 관통한 책”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이 필요한 나는, 그런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때 한껏 예민해진다. 일상의 소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타인의 목소리에서 해방되어 내 앞으로 파고들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때 내안의 고약한 마음들이 스멀스멀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다. 한번 형체를 갖춘 고약한 마음은 누군가를 향해 그 날카로운 끝을 들이밀어야 사그라들기 시작하고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일 때가 많다. 더 고약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진다. 그 끝이 나를 겨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난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상처를 주게 된다는 반복되는 패턴.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누구보다 내 곁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일 때가 많다. 내가 곁을 주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그게 한 사람이라는 것도 한바탕의 폭풍이 지나간 뒤, 내 자신을 질.. 2022. 6. 20.